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문단 편집) === 우표 수집가 === > "난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2년]]. 루스벨트는 엄청난 [[우표 수집]]광이었다. 재임 중에는 친구이자 우취가, 심지어 '''당대 최고의 우표덕인 제임스 A. 팔리를 체신부 장관에 앉혀놓고'''[*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덧붙이자면, 우표 수집을 즐긴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을 앉힌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이 일치하는 인물이였으며]], 제임스 팔리는 루스벨트의 당선에 지대한 공을 세운 바 있는 날카로운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고 대공황 과정에서 우체국과 우편국 등 체신부에서 관리해야 하는 것을 평균 이상으로 훌륭하게 관리했다. 이후 루스벨트의 3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며 루스벨트와의 정치적 관계를 끝냈다. 다만 사적으로는 사이가 계속 좋았다고.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Farley|#]]] 친구와 함께 '''전국적인 단위로 우표덕질을 했다'''. 어머니의 날 기념우표 도안을 직접 해서 우정장관에게 전달한다든가, 시쇄에 반드시 친필 서명을 남긴다든가 하는 식. [[1939 뉴욕 엑스포]] 기념우표는 압권인데, 당대까지는 [[전지#全紙|전지]] 하나에는 우표 디자인 최대 2개만 사용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팔리와 루스벨트는 이 금기를 깨고 A0 우표 전지 하나에 1939 뉴욕 엑스포의 각 전시관을 담은 32가지의 디자인을 담아놓은 우표세트를 발매했다.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다.]의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후에 법무장관이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도 어렸을 때 우표 수집이 취미였다고 한다.]에게 자신이 모은 우표를 보내주기도 했으며 로버트가 루스벨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 루스벨트는 로버트에게 우표들을 보내면서 적은 편지에 "짬 나면 백악관에 한 번 놀러와라. 내가 모은 우표들을 보여주마."라고 쓰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제임스 할리가 1940년 3선을 한 자신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퇴하자 또다른 우리 라인인 프랭크 코머퍼드 워커를 체신부 장관으로 모셔와서 죽는 날까지 우표 덕질을 했다. 다만 아쉽게도 루스벨트가 죽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자 우취가 장관들은 짤리고 로버트 해네건[* 민주당 전국위원장 출신으로, 급진 성향의 헨리 A. 월리스 부통령이 다시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받지 못하게 막는등 보수적 면모가 강한 인물이었다.]이라는 관료가 들어오면서 루스벨트식 우표 발행은 중단된다. 기록에 따르면,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기 직전에도 루스벨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우표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우취 오덕질은 단순한 오덕질 수준만은 아니라, 대공황기와 2차대전 중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한가지로도 쓰였다. 우표 수집광인 대통령답게 그가 수집한 우표를 보고 있는 도안으로 우표가 여러 번 발매되기도 했는데, 그 중엔 루스벨트가 [[다지증|육손]]인 도안도 있다. [[파일:external/postalmuseum.si.edu/1d_FDR-05.jpg|width=100%]] 바로 이 우표인데, 1947년 [[모나코]]에서 발행된 것이다. 이 도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다른 루스벨트 관련 우표보다 가치가 높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